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창경궁 영춘헌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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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. 개요[편집]
창경궁의 주거 건물이다. 양화당의 동쪽에 있으며 집복헌과 붙어 있다.
‘영춘(迎春)’은 ‘봄(春)을 맞는다(迎)’는 뜻이다. 현판은 봉조하[2] 남공철이 썼다.
2. 역사[편집]
원래 이 일대에 후궁 처소가 모여있었으므로, 영춘헌도 본래는 후궁 거처였던 듯 하다.
창건 연대는 모르나 기록 상 처음 나타나는 것은 정조 때이다. 정조는 창경궁 옛 홍문관에 감인소란 이름을 붙이고 즐겨읽는 책들을 그 곳에서 편찬, 인쇄했다. 그리고 감인소 근처에 있는 영춘헌에 주로 머무르며 이곳을 서재와 집무실로 활용했다.#
1796년(정조 20년) 6월에는 정리당상(整理堂上) 이시수가 건물을 고쳐지을 것을 청했다.# 임금이 거주하는 건물의 규모가 협소하다는 이유였다. 그러나 정조가 허락하지 않았다.
이후에도 영춘헌에 주로 머물던 정조는 1800년(정조 24년) 6월에 이곳에서 승하했다. 이 때 영조의 계비 예순왕대비(정순왕후)가 영춘헌을 빈전으로 쓰려 했으나 좁다는 이유로 대신 환경전을 빈전으로 정했다.#
1830년(순조 30년) 8월에 화재로 불탔고 1833년(순조 33년)에 다시 지었다. 이 때 창덕궁 중희당 근처에 있던 연영합(延英閤) 일대에 있던 천지장남궁(天地長男宮)을 헐어 지었다고 한다.
재건 이후 정조를 닮고 싶었던 후대 임금들도 영춘헌을 많이 활용했다. 헌종은 이곳에서 국사를 돌보고 경서 강독을 했으며,## 아플 때도 영춘헌에 머물면서 치료를 받았다.# 고종도 헌종처럼 영춘헌에서 경서를 읽고 정사를 보았으며 신하들을 만났다.# 마지막으로 나타난 역사 기록은 1894년(고종 31년) 4월 8일 《승정원일기》 기사이다. #
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바꾸면서 많은 전각들을 헐었다. 그러나 영춘헌은 무사하여 오늘에 이른다.